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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4

그것은 우연하게 연하디 연한 숨결
달근하면서도 알싸한 감색이 입에 스미고
바짝 마른 공기가 혈관을 타고 흐른 뒤
혀끝에서부터 퍼지는 차가운 침묵의 확산

그녀도 나를 사랑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느 날 밤늦은 시간에 나를 불러낸 적이 있었다. 시원하고 건조한 밤이었다. 어두워지니 물소리며 풀벌레소리가 커졌다. 가로등이 빛 조각을 깨뜨리자 그녀의 작은 목소리가 깊게 울렸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나의 조용한 당황이 한동안 침묵을 만들어냈다. 무슨 말을, 행동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분명히 그녀와 나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었는데, 아니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야 하는데 명랑하지 않은 표정으로 이런 이야기를 토해낸 후엔 무슨 말이 듣고 싶은 것일까. 순간, 그녀가 가볍게 키스를 했다. 다음순간, 내가 숨을 쉬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떻게 숨을 쉬어야 하는지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게 그녀의 가벼운 입맞춤을 끝으로 서로 연락이 없었다.

이상하리만큼 침착해졌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슨 일에든 진심으로 화를 내거나 웃는 일이 귀찮아졌다.

그때부터였다. 그때부터 또 하나의 강진우가 만들어져 모든 감각과 감정을 받아들이고 있다. 진짜는 허상이 받아들이는 것들을 공유하고 분석하여 적당한 반응을 만들어낸다. 처음엔 견디기 힘겨울 만큼 어색했지만 불과 일 년 만에 평생을 그랬던 것처럼 너무나 익숙한 습관으로 나의 모든 곳에 스며들었다.

이제는 나의 마음 전체로 기뻐하고, 화내고, 슬퍼하는 것들이 귀찮아졌다. 어쩌면 무엇인가에 빠져드는 것이 두려워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by 곤난해 | 2008/01/26 00:06 | stories(날개) | 트랙백 | 덧글(0)

날개 #3

얼마 전 걸려온 전화의 상대가 정말 혜원이었는지 확인하고 싶다. 분명 그녀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그런데 지금은 확신이 없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혜원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혜원의 소식이 궁금해졌다. 나를 떠나간 이후에도 원하진 않았지만 가끔 연락이 오다가 반년 쯤 전에 내가 알고 있던 전화번호가 사라졌다. 번호를 바꾼 것인지 아니면 휴대폰을 없애버린 건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전화번호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5일분의 공허함에 시달려야 했다. 가끔 연락이 올 때는 받지도 않고 무시해버렸으면서 번호가 사라지고 나서야 수시로 전화를 걸어 없는 번호임을 확인했다.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을 때가 있다. 상황이 모든 것을 지배할 때가 있다. 지금의 나는 의지와 상관없이 걸음을 옮기며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찾고 있다. 정오의 햇살이 따갑다.
정문은 더위에 질려 늘어지고 있었지만 꼿꼿하게 서있는 한 사람을 품고 있었다. 본 적이 있다. 혜원이 친한 친구라며 소개시켜준 적이 있다. 그녀가 친구를 소개시켜 준 것은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날카로운 형사 이미지의 남자를 생각했는데 밝은 이미지로 남아있는 여자가 서있어 조금은 의외였다.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말을 기다렸지만 그녀의 검은 눈빛은 견고했다. 매미의 허물처럼 으스러질 듯한 견고함은 숨죽인 불안을 담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지난번에 만났을 때 이미 존댓말은 하지 않기로 했기에 편안한 듯 말했다. 그럼에도 둘 사이에 혜원이 빠지니 어딘가 얇은 녹이 슨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내가 묻고 싶은 게 바로 그거야.]

그녀가 되묻는다. 해줄 이야기가 없다. 오히려 일 년이 넘는 시간동안 소식이 없던 혜원이 뜬금없이 실종되었고, 단 한번 만난 그녀의 친구가 학교까지 찾아와 나를 불러내는 이유가 못 견디게 궁금하다.

[정말 실종된 거야?]

다시 질문을 이었다. 어떻게 보더라도 명백한 무죄의 상황이다. 그녀가 대답을 시작하자마자 나의 무관성에 대하여 열띤 연설을 시작할 생각이다. 애초에 나와 상관없는 이 상황을 얼른 벗어나고 싶다.

[점심은 먹었니?]

by 곤난해 | 2008/01/25 23:30 | stories(날개)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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